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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김해/ 김해 랜선 여행]황세 장군과 여의낭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품고 있는 봉황대 유적지

온라인 명예기자단 윤근애



 

가야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봉황동 유적지는 국내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뤄졌던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진 곳이며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입니다.

 


 

봉황동 유적지는 고인돌, 조개무지, 항구 시설, 봉황 토성 등이 발굴되어 청동기 시대부터 가야 시대까지의 복합 유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가야인의 생활상과 더불어 가야왕권의 존재를 보여주는 중요한 곳입니다.

 


 

봉황동 유적지에는 주거시설인 고상 가옥과 망루, 여의각, 황세 바위, 패총 전시관 등이 있습니다.

회현리 패총은 조개껍데기 등이 쌓여 만들어진 조개무지인데요. 이곳에서 발견된 각종 철기 및 골각기, 토기와 탄화미 등은 가야 시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고 이곳에서 발견된 중국 화폐 화천은 당시의 국제 교역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가야 시대의 무사와 말을 복원해 놓았는데요. 기마 무사상은 국보인 도기 기마 인물형 뿔잔과 기마인물형토기와 가야 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참고하여 청동 주물로 제작한 것입니다.

복원된 기마 무사상은 창을 든 무사뿐만 아니라 말에도 철제 투구와 갑옷을 입혀 보호하고 있어 가야의 우수한 철기 문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함께 보여주고 있으며, 화려한 금동제의 말장식과 섬세한 말갖춤새는 가야 기마 무사의 위상과 고도로 발달한 가야문화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고상 가옥은 봉황동 유적에서 발굴된 가야 시대 고상 건물지와 가야 시대 집 모양 토기를 참고하여 추정 복원한 것입니다.

 


 

고상 가옥은 건물 바닥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한 특수 용도의 건물이 많습니다.

가야 시대의 접안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해반천에 입지한 조건이나 구조 및 열을 지어 다량으로 분포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이곳에서 발굴된 고상 가옥들은 대외ㅣ교역을 위한 창고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봉황대는 조선 시대에 김해 부사를 지낸 정현석이 '언덕의 모양이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과 같다'하여 대를 쌓고 봉황대라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구릉 주변에서는 가야 시대의 다양한 생활 유적 및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구릉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가 어린시절 함께 지냈다고 전해지는 황세바위가 있고 봉황대 서쪽에서는 가야 시대 토성과 대규모 창고형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옛 봉황초등학교 남쪽에서는 가야 시대의 배가 발견되어 당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던 가야의 해상왕국으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주변을 효율적으로 관찰하고 경계하기 위해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인 망루는 외부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시설인데요. 봉황동 유적지에 세워진 망루는 가야 시대 당시의 건축기술과 구조를 고려하여 추정 복원한 것으로 높이는 약 10M입니다.

 


 

봉황유적은 금관가야의 도성 유적으로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어 선박의 진, 출입과 외적의 침입을 관찰 감시하기 위해 어느 곳보다 많은 망루를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봉황동유적에서 발굴 조사된 가야 시대 건물지 등을 참고로 하여 봉황동 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한 고상 가옥 주거인데요. 고상 가옥은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 방해, 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의낭자의 정절을 추모하는 사당인 여의각인데요. 여의각은 1973년 회현동민들의 힘으로 사당을 건립하고 매년 단오날 추모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울긋불긋 오색으로 물들어 가는 단풍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락국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일컬어지는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오는 황세바위를 만날 수 있답니다.

 



 

황세장군은 가락국의 9대 임금 겸지왕 때의 인물로 황정승의 아들인데요. 어릴 적 여의낭자와 혼인을 약속하였지만 황세장군이 신라군을 물리친 공로로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되고 여의낭자는 다른 사람과 혼인하라는 출정승의 권유를 뿌리치고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다가 꽃다운 24세의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황세장군 또한 여의낭자를 그리워하다 병을 얻어 여의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유민공주는 유민산(임호산)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가야인의 식생활은 벼농사가 주 생업이지만 그 밖의 곡물도 같이 재배하였으며 단백질원의 확보를 위한 굴, 조개 채취나 고기잡이, 사슴, 멧돼지 등의 사냥도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시루 등 각종 취사 그릇 조리용 도구들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다양한 조리법을 구사할 줄 알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의생활은 철기에 녹과 함께 부착된 섬유 흔적을 통해 면이나 삼베, 비단 같은 직물 의복을 지어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긴 저고리와 폭이 넓은 치마를 착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가야인의 주거 생활 중 하나인 가옥은 얕은 수혈을 파고 만든 움집 형태로 온돌과 취사, 난방을 겸하는 부뚜막 등이 잘 구비 되어 있으며, 지금의 원두막과 비슷하게 생긴 창고 용도의 고상 가옥도 만들어 습기나 동물로부터 곡식이나 귀중품 등을 안전하게 보관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야 시대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고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품고 있는 봉황대 유적지를 찾아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해보세요.

 

 


 

[경남 김해/ 김해 랜선 여행]황세 장군과 여의낭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품고 있는 봉황대 유적지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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